태국오영철 보여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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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영철 작성일26-06-24 17:58 조회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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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지 마세요〉
그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그의 헌신, 그것을 대하는 태도, 손님을 섬기는 환대의 자세가 나를 부끄럽게 한다. 깊은 산골에 위치한 카렌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모습이다.
2026년 5월 17일, 나끄랑 교회 헌당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를 마친 후 예정에 없던 방문이 이루어졌다. 푸톤 장로의 집이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간 터라 실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쑥 찾아온 우리 일행을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그의 환대도 감동이었다. 그런데 더 큰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정이 하나님을 향해 쌓아온 헌신의 이야기였다.
푸톤 장로는 지역 보건진료소장이었다.
"사실 저는 이런 공무원 자리를 할 만한 조건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어떻게 보건소장이 되었는지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야기 내내 그가 반복한 것은 두 가지였다. 불가능했던 조건.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은혜. 그의 두 자녀는 모두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다. 며느리는 군청 행정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카렌 공동체에서는 매우 드문 공무원 가족이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격식이나 습관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었다.
그런데 그의 진심은 고백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번 나끄랑 교회 건축 이야기가 나왔다. 그의 가족은 4년에 걸친 건축 기간 동안 총 100만 바트, 약 5천만 원이 넘는 헌금을 드렸다. 건축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것은 그의 수입으로 몇 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카렌 교인 가운데 헌신한 분들을 여럿 만났지만, 이만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기간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부인은 가축을 사고파는 일을 했는데 최근 손해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주저 없이 드렸다. 넉넉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린 헌신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식이 없었다. 자랑하려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는 이 방문 전까지 이 헌신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정도의 헌금이라면 당연히 알려졌을 법했다. 처음 듣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이유는 그의 태도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헌신을 알아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뿐이다.
떠날 시간이 되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함께 간 카렌 지도자들에게 쌀과 감자 봉지를 건넸다. 그리고 내게는 작은 봉투를 하나 더 내밀었다. 1,000바트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와는 이날 처음 만났다. 봉투를 돌려드리려 하자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마세요."
그것이 그였다. 알려지는 것을 조심했다. 드러내는 것을 꺼렸다. 내가 그 가족보다 형편이 나은 것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최선으로 섬겼다.
이 모습은 오늘날의 풍조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행동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SNS는 그러한 욕구를 더욱 자극하는 것 같다.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자신의 도움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선교사들의 SNS를 보면 자신의 사역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강조한다. 자신의 역할이 현지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으며, 현지 교회가 큰 유익을 얻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예일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세계 기독교학(World Christianity)'을 강의한 라민 사네(Lamin Sanneh)는 핵심을 찌르는 주장을 했다. 기독교는 "그 창시자의 언어나 발생 문화 없이 전파되는 유일한 세계 종교"(Whose Religion is Christianity?, 2003)라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가져온 언어와 문화가 복음을 이끈 것이 아니다. 현지인들이 복음을 자신의 언어와 삶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헌신하며 전파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성장했다. 사네의 결론은 분명하다. 선교의 진정한 주역은 선교사가 아니라, 현지 교회와 그 신자들이다.
푸톤 장로는 그 주장을 몸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말없이, 겸손하게, 분에 넘치는 헌신을 감당했다.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면서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카렌 교회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다. 이름 없이 섬긴 현지 신자들의 헌신이 교회를 세운 것이다.
나의 모습은 어떤가? 내가 갈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교사로서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후원자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가? 내가 SNS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행동 앞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들이다.
푸톤 장로의 삶은 나의 거울이다. 그의 헌신이, 그 고백이, 그 환대가, 그리고 그의 한마디가 나를 드러낸다.
"보여주지 마세요."
그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참 작다고 느끼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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