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스무번째 새해를 맞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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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봉식 작성일15-01-01 03:18 조회5,507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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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번째 새해를 인도에서 맞으며.
2015년은 제가 선교사 신분으로 인도에 와서 20 번째 새해를 맞는 해입니다.
참,,, 시간이 빠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30 대 중반에 첫발을 내디딘 인도 선교지였는데, 벌써 50 대 중반이 되어 버렸네요.
머리 숯이 엄청 많았는데, 20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빠졌습니다.
요즈음은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라도 빠지면 마음이 아픕니다.
20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저의 가정과 사역위에 많은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1995년 1월 13일, 당시 장흥 중앙 교회 백영태 목사님이 하신
“우리 2월에 인도에 선교 답사 하로 가야하니까, 여권 가져와라”는 말씀은
선교사로 하나님께 내 삶을 헌신하겠다고 약속하고 91년부터 어렵게 선교사 훈련을 받으며 준비했던, 그 준비 과정을 마치게 했던 말씀 이였습니다.
백 목사님은 제가 파송 받을 때 저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1, 무엇에든지 정직하게 하라. (선교 보고, 물질 사용에 대해서)
2, 누구와도 원수 관계 만들지 말라 (한국인이든, 현지인이든)
5 년 후 백 목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이 두 가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 첫 번째는 지금까지 잘 지키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좋은 인간 관계를 만들고 싶은데 그들이 나를 좋지 않게 보고,
특히 도와주면 천사의 얼굴이요,
후원을 중단하면 마귀 할멈 얼굴처럼 변하는 인도 목사들을 만나고,
같은 한국 선교사이지만, 다른 선교사의 사역이 잘 되면 배아파하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두 번째 것은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슴 드렸습니다.
20년을 인도에서 살아오면서 기쁘고, 힘들었던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95년 2월 중순, ( 2 월 14일인가, 16일인가 긴가 민가,,,,,)
인도 첸나이 공항에 내려서 입국 심사를 받기위해 기다리는 동안 내 팔을 물고 포식하고
도망갔던 모기(이 모기 지금도 살아있을까),
어두컴컴한 공항 내부 모습,
처음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냄새,
한 밤중 벵갈로로 오는 도중에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차량들,
길가에 너무 너무 버려진 쓰레기들, 사람, 차량, 소,
- 그 무엇도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도로를 가로지르고,
자기 마음대로 가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기계들,
철로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져 있어서 금방 기차가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30 분 후에 기차가 지나간 일,
전혀 인도를 선교지로 생각하지 않았던 제가 인도에 첫발을 내 디뎠을 때 보고 느껴진
인도의 첫 인상들이였습니다.
그 후 20 년이란 시간은 저와 저의 가정, 그리고 사역에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였습니다.
인도에 올 때 7살이던 딸은 지금 27 살이 되었네요,
4살이었던 아들은 24 살이 되었고, 군 생활도 마치고, 지금 대학교 3 학년입니다.
인도에 도착한 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녀들에 대해
"민수기 6장 23 - 27 절"을 인용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지만)
" 하나님은 우리 성휘와 의민이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우리 성휘와 의민이에게 비취사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우리 성휘와 의민이에게 향하사 평강을 주시고 앞길을 인도하시며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
이것이 두 자녀에 대한 우리 부부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인도에 있는 다른 한국 선교사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휘, 의민이게게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 언어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선교 부지를 구입하기 위하여
3 개월 동안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16 명의 공무원들에게 거시기를 주면서 구입 허가서를 받았던 일,
* 선하게만 보였던 인도 목사를 만나서, 가정 교회를 시작했지만, 불과 몇 개월 후에 돈과 교회가
사라졌던 일,
* 점점 Big Problem 이 되어 가는데 입술에 침하나 바르지 않고
NO Problem 하면서 안심을 시켜주었던 고마웠던 사기꾼 목사들,
* 감사와 십일조를 몰라서 가르쳐 주니까,
저를 이상한 사이비 목사로 생각하고 뒷걸음치며 멀어져갔던 자격이 의심되었던 목사.
* 새벽기도와는 담을 싸며,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하면 하루 나오고 일주일은 나오지 않았던
뚱뚱한 목사.
* 어느 날, 나에게 줄 것이 있다면서 찾아와 받아보니 무슨 영수증,
무엇이냐고 물으니 주일날 입기위해 옷을 맞추었는데 그 영수증이니 돈을 달란다,,,,,,
기가 막혔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면서 옷값을 주니 입이 너무 너무 크게 벌어지면서
돌아갔던 목사.
( 나중에 집을 사고 집값을 대신 내라하지 않나 염려 했는데,,, 스스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 오토바이를 사주니, 1월에도 53 km, 5월에도 53km, 10월에도 53km,
기름 값을 아낀다고 사용하지 않고 교회 안에 오토바이를 모셔 놓았던 목사.
*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온 선교사를 도울까 가 아니라,
저 선교사를 통하여 나의 유익을 만들까 궁리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던 목사,
* 교회 건축 후, 후원 교회의 사정으로 1 년 후 헌당 예배를 드리자고 했더니,
헌당 예배 직 전에 교회를 팔아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린 데마 같은 사람.
*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기차로 왕복 115 시간을 5 번이나 탔던 시간들,
* 타니산드라 중앙 교회 교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고 도망간 목사,
당시 50 여명의 교인들이 출석했는데 30 여명이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 버렸죠.
* 교인들 심방을 보냈더니, 교인들과 저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교인들 출석을 방훼 했던 목사.
* 도와주면 천사의 얼굴로 다가왔고, 도와주지 않으면 마귀의 모습으로 대적했던 목사들,,,
지금은 이 사람들이 어디서 목회를 하고 있을까 !
20년을 맞는 이 시간 문득 그 인간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좋은 목사들과 성도들도 만났습니다.
* 진심으로 이해를 해주고, 한발 앞서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헌신했던 목사,
* 후원비를 받으로 오면서 빈손으로 오지 않는 무니 목사,
* 새해를 맞이하여 선물로 촌닭을 두 마리 가져오는데 기차 안에서 한 마리 잃어 버렸다면서,,,,,
미안해했던 아브라함 목사.
*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나에게 와서 도와주는 아론 형제,
* 최근에 센터 입구 도로 파손으로 동네 불량배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릴때
작은 체구임에도 그 불량배들을 맞섰던 “라주, 쌍칼, 카르틱, 하리샤” 형제들.
(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생략 )
여러 모양의 동역자들을 만나서 인도 교회와 기독교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게 해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타니산드라 중앙 교회 설립후 98년부터 지금까지 18년을 함께하는 3 가정의 교인들,,,,,
이들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20 년 시간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깨달았다면,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며, 인간 관계였습니다.
인도뿐만 아니라 어느 선교지에도 있습니다
- 같은 한국 선교사들끼리 시기와 질투, 모함하며,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실현되고
볼 수 있는 곳이 선교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한국에서 가장 열심히 선교하는 교회에서 파송 받았습니다.
제 선교사 사역이 끝나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저를 파송한
“장흥 중앙 교회” 그리고 장로님들과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선교를 가장 많이 이해를 해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김 정렬 목사님,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를 파송해 주신 백영태 목사님도 잊지 못합니다.
제가 한국에 가면 맨 먼저 담임 목사님, 수 장로님, 선교 부장님께 전화나,
혹은 문자로 도착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장흥에 내려가면 맨 먼저 담임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수 장로님 찾아뵙고,
또한 선교 부장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장흥에 내려가 인사를 들이로 찾아뵐 때마다 따듯한 차를 주시며,
수고 많다고 위로해 주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던 故 백원술 장로님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파송 교회는, 제가 파송 받을 때에 제가 모르는 성도님들이 훨씬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도 저와 인도 선교를 위해 많은 기도와 사랑을 베푸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단 몇 년이라도 기도해주시며 협력해주시는 후원 교회와 선교 동역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협력 후원 해주시는 후원 교회와 선교 동역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이 사랑과
헌신이 오래 오래 가기를 원합니다.
사실 지난 20 년 동안 건강에 몇 차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감상선 제거 수술, 양 팔꿈치 수술, 쓸개 제거 수술,,,,,
이제 은퇴까지 남은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게 남았네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하고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인도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더 열심히, 하나님과 파송 교회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성실하게
사역할 것입니다.
폭죽이 터지며 밤하늘을 수놓고 " Happy New Year " 라고 인사를 하면서 새해를 반기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지나간 20년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 2015년 금년에도 사역을 지켜 주시고 많은 인도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게 하소서",,,,,,,,
모든 교인들이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 후 교회에 남아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2015년은 제가 선교사 신분으로 인도에 와서 20 번째 새해를 맞는 해입니다.
참,,, 시간이 빠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30 대 중반에 첫발을 내디딘 인도 선교지였는데, 벌써 50 대 중반이 되어 버렸네요.
머리 숯이 엄청 많았는데, 20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빠졌습니다.
요즈음은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라도 빠지면 마음이 아픕니다.
20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저의 가정과 사역위에 많은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1995년 1월 13일, 당시 장흥 중앙 교회 백영태 목사님이 하신
“우리 2월에 인도에 선교 답사 하로 가야하니까, 여권 가져와라”는 말씀은
선교사로 하나님께 내 삶을 헌신하겠다고 약속하고 91년부터 어렵게 선교사 훈련을 받으며 준비했던, 그 준비 과정을 마치게 했던 말씀 이였습니다.
백 목사님은 제가 파송 받을 때 저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1, 무엇에든지 정직하게 하라. (선교 보고, 물질 사용에 대해서)
2, 누구와도 원수 관계 만들지 말라 (한국인이든, 현지인이든)
5 년 후 백 목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이 두 가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 첫 번째는 지금까지 잘 지키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좋은 인간 관계를 만들고 싶은데 그들이 나를 좋지 않게 보고,
특히 도와주면 천사의 얼굴이요,
후원을 중단하면 마귀 할멈 얼굴처럼 변하는 인도 목사들을 만나고,
같은 한국 선교사이지만, 다른 선교사의 사역이 잘 되면 배아파하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두 번째 것은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슴 드렸습니다.
20년을 인도에서 살아오면서 기쁘고, 힘들었던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95년 2월 중순, ( 2 월 14일인가, 16일인가 긴가 민가,,,,,)
인도 첸나이 공항에 내려서 입국 심사를 받기위해 기다리는 동안 내 팔을 물고 포식하고
도망갔던 모기(이 모기 지금도 살아있을까),
어두컴컴한 공항 내부 모습,
처음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냄새,
한 밤중 벵갈로로 오는 도중에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차량들,
길가에 너무 너무 버려진 쓰레기들, 사람, 차량, 소,
- 그 무엇도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도로를 가로지르고,
자기 마음대로 가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기계들,
철로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져 있어서 금방 기차가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30 분 후에 기차가 지나간 일,
전혀 인도를 선교지로 생각하지 않았던 제가 인도에 첫발을 내 디뎠을 때 보고 느껴진
인도의 첫 인상들이였습니다.
그 후 20 년이란 시간은 저와 저의 가정, 그리고 사역에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였습니다.
인도에 올 때 7살이던 딸은 지금 27 살이 되었네요,
4살이었던 아들은 24 살이 되었고, 군 생활도 마치고, 지금 대학교 3 학년입니다.
인도에 도착한 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녀들에 대해
"민수기 6장 23 - 27 절"을 인용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지만)
" 하나님은 우리 성휘와 의민이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우리 성휘와 의민이에게 비취사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우리 성휘와 의민이에게 향하사 평강을 주시고 앞길을 인도하시며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
이것이 두 자녀에 대한 우리 부부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인도에 있는 다른 한국 선교사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휘, 의민이게게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 언어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선교 부지를 구입하기 위하여
3 개월 동안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16 명의 공무원들에게 거시기를 주면서 구입 허가서를 받았던 일,
* 선하게만 보였던 인도 목사를 만나서, 가정 교회를 시작했지만, 불과 몇 개월 후에 돈과 교회가
사라졌던 일,
* 점점 Big Problem 이 되어 가는데 입술에 침하나 바르지 않고
NO Problem 하면서 안심을 시켜주었던 고마웠던 사기꾼 목사들,
* 감사와 십일조를 몰라서 가르쳐 주니까,
저를 이상한 사이비 목사로 생각하고 뒷걸음치며 멀어져갔던 자격이 의심되었던 목사.
* 새벽기도와는 담을 싸며,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하면 하루 나오고 일주일은 나오지 않았던
뚱뚱한 목사.
* 어느 날, 나에게 줄 것이 있다면서 찾아와 받아보니 무슨 영수증,
무엇이냐고 물으니 주일날 입기위해 옷을 맞추었는데 그 영수증이니 돈을 달란다,,,,,,
기가 막혔지만,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면서 옷값을 주니 입이 너무 너무 크게 벌어지면서
돌아갔던 목사.
( 나중에 집을 사고 집값을 대신 내라하지 않나 염려 했는데,,, 스스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 오토바이를 사주니, 1월에도 53 km, 5월에도 53km, 10월에도 53km,
기름 값을 아낀다고 사용하지 않고 교회 안에 오토바이를 모셔 놓았던 목사.
*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온 선교사를 도울까 가 아니라,
저 선교사를 통하여 나의 유익을 만들까 궁리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던 목사,
* 교회 건축 후, 후원 교회의 사정으로 1 년 후 헌당 예배를 드리자고 했더니,
헌당 예배 직 전에 교회를 팔아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린 데마 같은 사람.
*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기차로 왕복 115 시간을 5 번이나 탔던 시간들,
* 타니산드라 중앙 교회 교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고 도망간 목사,
당시 50 여명의 교인들이 출석했는데 30 여명이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 버렸죠.
* 교인들 심방을 보냈더니, 교인들과 저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교인들 출석을 방훼 했던 목사.
* 도와주면 천사의 얼굴로 다가왔고, 도와주지 않으면 마귀의 모습으로 대적했던 목사들,,,
지금은 이 사람들이 어디서 목회를 하고 있을까 !
20년을 맞는 이 시간 문득 그 인간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좋은 목사들과 성도들도 만났습니다.
* 진심으로 이해를 해주고, 한발 앞서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헌신했던 목사,
* 후원비를 받으로 오면서 빈손으로 오지 않는 무니 목사,
* 새해를 맞이하여 선물로 촌닭을 두 마리 가져오는데 기차 안에서 한 마리 잃어 버렸다면서,,,,,
미안해했던 아브라함 목사.
*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나에게 와서 도와주는 아론 형제,
* 최근에 센터 입구 도로 파손으로 동네 불량배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릴때
작은 체구임에도 그 불량배들을 맞섰던 “라주, 쌍칼, 카르틱, 하리샤” 형제들.
(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생략 )
여러 모양의 동역자들을 만나서 인도 교회와 기독교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게 해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타니산드라 중앙 교회 설립후 98년부터 지금까지 18년을 함께하는 3 가정의 교인들,,,,,
이들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20 년 시간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깨달았다면,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며, 인간 관계였습니다.
인도뿐만 아니라 어느 선교지에도 있습니다
- 같은 한국 선교사들끼리 시기와 질투, 모함하며,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실현되고
볼 수 있는 곳이 선교지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한국에서 가장 열심히 선교하는 교회에서 파송 받았습니다.
제 선교사 사역이 끝나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저를 파송한
“장흥 중앙 교회” 그리고 장로님들과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선교를 가장 많이 이해를 해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김 정렬 목사님,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를 파송해 주신 백영태 목사님도 잊지 못합니다.
제가 한국에 가면 맨 먼저 담임 목사님, 수 장로님, 선교 부장님께 전화나,
혹은 문자로 도착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장흥에 내려가면 맨 먼저 담임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수 장로님 찾아뵙고,
또한 선교 부장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장흥에 내려가 인사를 들이로 찾아뵐 때마다 따듯한 차를 주시며,
수고 많다고 위로해 주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던 故 백원술 장로님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파송 교회는, 제가 파송 받을 때에 제가 모르는 성도님들이 훨씬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도 저와 인도 선교를 위해 많은 기도와 사랑을 베푸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단 몇 년이라도 기도해주시며 협력해주시는 후원 교회와 선교 동역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협력 후원 해주시는 후원 교회와 선교 동역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이 사랑과
헌신이 오래 오래 가기를 원합니다.
사실 지난 20 년 동안 건강에 몇 차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감상선 제거 수술, 양 팔꿈치 수술, 쓸개 제거 수술,,,,,
이제 은퇴까지 남은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게 남았네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하고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인도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더 열심히, 하나님과 파송 교회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성실하게
사역할 것입니다.
폭죽이 터지며 밤하늘을 수놓고 " Happy New Year " 라고 인사를 하면서 새해를 반기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지나간 20년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 2015년 금년에도 사역을 지켜 주시고 많은 인도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게 하소서",,,,,,,,
모든 교인들이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 후 교회에 남아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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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식 작성일사진은 12월 29일 교인 소풍을 가서 단체, 일하느라고 절반 정도 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성탄 전야 24일, 학생들과 함께 만들고 했던 30 분 짜리 뮤지컬을 마치고 기념 사진으로 찰칵.